서자의 억울함에서 권력의 정점으로 -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Carolus Martellus, Karl Martell
680-741년
인류 역사상 3대를 거처 계속해서 권력을 키웠던 가문. 강력한 왕권으로 프랑크 서로마 제국을 건설하여 로마 제국을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운 시초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그 역사의 시작은 서자의 억울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 죽음의 고비를 넘어 권력의 중심으로
프랑크 왕국 클로타르 1세 Chlotar I (558-561년)는 모든 재산을 자녀들에게 균등하게 분할하는 전통에 따라 4개 지역 – 파리 Paris + 오를레앙 Orleans, 부르고뉴 Bourgogne, 아우스트라시아 Austrasia, 네우스트리아 Neustria을 4 자녀에게 상속합니다.
그렇지만 각 지역을 상속받은 왕자들이 후일 왕위에 오른다고 해도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재상 Maior Dominus (기존에는 궁재라는 단어를 사용함)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글로타르 1세 당시 프랑크 왕국 복동쪽 아우스트라시아 지역의 재상은 바로 피핀 2세 Pippinus II였습니다. 이 피핀 2세는 모젤 출신 플렉투르데 Plectrude와 결혼하였는데, 지참금으로 많은 양의 재산을 가져왔던 탓에 결혼 이후에도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피핀 2세는 플렉투르데를 통해 드로고 1세와 그리모알트 2세 두 명의 아들을, 그리고 후궁인 노예 출신 알파이스를 통해 카를 마르텔과 힐데브란트를 얻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서자의 자식들은 피핀 2세에게 인정을 못 받고 아무런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본처의 아들인 드로고는 부르군트 공작과 카파네 백작직에, 그리모알트 2세는 네우스트라 재상에 임명됩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카를 마르텔이 아버지의 뜻에 거역하여 반기를 들려고 하려는 과정에서 드로고 1세는 708년 갑자기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모알트는 2세는 아버지의 권력을 이어받기 위해 알프스를 넘다가 마찬가지로 괴한의 습격을 받아 죽게 됩니다.
이제 살아있는 직계 자녀는 카를 마르텔과 힐데브란트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재산 상속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아버지 피핀 2세는 그리모알트 2세의 아들인 10살 베기 테오도알트 Theodoald에게 아우스트라시아 재상직을 물려주고, 손자인 테오도알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부인인 플렉투르데가 섭정하도록 하고 714년 숨을 거둡니다.
모든 정권을 잡은 플렉투르데는 카를 마르텔이 피핀 2세의 뜻을 거역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감옥에 투옥시켰으나 카를 마르텔은 도망쳐 반격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렇게 피핀 2세가 죽은 후 플렉투르데와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간 권력다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프랑크 왕국 전체에 바르게 퍼져 나갔고, 이는 프랑크 국왕인 힐데리히 2세나 네우스트리아 분국의 귀족들에게는 아우스트리아의 힘을 빼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힐데리히 2세는 네우스트리아 재상인 라감프리드를 지원하여 아우스트라시아를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아우스트리아의 섭정을 맡고 있었던 플렉투르데는 피핀의 보물들로 라감프리드 재상을 회유하였지만 이때를 기회로 여겼던 가를 마르텔은 퇴각하는 네우스트리아 군대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둡니다. 1년 뒤인 717년 카를 마르텔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네우스트리아를 공격하는데,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라감프리드는 성을 버리고 파리로 도망하여 카를 마르텔은 네우스트리아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카를 마르텔은 군대를 아우스트라시아로 돌려 클렉트루데와 귀족들에게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렇게 카를 마르텔은 서자 출신으로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고 프랑크 왕국의 권력을 움켜쥐게 되었는데, 자신의 원수와 반대파를 카를은 무자비하게 응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망치로 모든 원수와 반대 세력을 산산이 부숴버린다는 의미에서 망치를 나타내는 "마르텔 루스 Martellus (프)", "마르텔 Martell(독)"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2. 정복 전쟁
카를 마르텔은 재상 Maior Dominus 자리에 앉은 후 프랑크 왕국 – 더 정확히 말하면 아우스트라시아 접경에 위치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프리기아(719년)와 알레마니아(730년)를 응징한 후 프랑크 왕국으로 흡수하였습니다. 또한 작센과 바이에른 공국을 공격하여 카를 마르텔의 건재를 확인시키며 국경의 안정을 확보하였습니다.
카를 마르텔이 이렇게 주변 국가를 무력으로 진압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자신이 도망자 신세였을 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원한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들이 모두 비 기독교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카를은 일단 무력으로 정벌하기에 앞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도록 선교사들과 주교를 파견하였는데, 이들의 설득에도 변하지 않고 계속 무력시위를 하는 국가들에 한해서 다시 무력으로 복속시키는 전략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인츠 주교로 있었던 성 보니파시오는 카를 마르텔을 ‚게르만의 사도‘로까지 칭송했다고 합니다.

3. 기독교의 수호자
당시 프랑크 왕국과 주변 국가(프리기아, 알레마니아, 작센 및 바이에른)들과 다른 점은 바로 종교였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일찍이 로마 가톨릭의 국교로 삼고 있었으며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수도원 운동을 통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카를 마르텔도 기독교 신앙심으로 항상 선교사들의 후원과 기독교 및 로마 교황청의 후견인이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716년 프리기아에서 추방당한 선교사 윌리브로드의 후견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작센과 바이에른, 알레만 등을 정벌한 후에는 수도원 선교를 후원하는가 하면, 이교도의 종교 제단을 파괴하고 지배 세력들의 개종을 강요하였습니다. 심지어 게르마니쿰 의회를 소집하여 "프랑크 공작의 후원 없이는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교회 사람들, 장로, 성직자, 수도자, 수녀들을 지킬 수 없다"라고 선언함으로 자신이 기독교의 수호자로서 선봉에 설 것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수도원과 교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성직자들과 전혀 다른 기준이었기 때문에 교회와 수도원의 반발을 많이 샀습니다. 왜냐하면 군사 비용이 부족하거나 가신들에 대한 봉토가 필요할 때는 교회와 수도원 등의 재산을 압수하여 배분하였고, 교회와 수녀원의 재산으로 군비를 충당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상업이나 농업에 종사했는데, 마르텔은 교회나 수도원에 쌓이는 재산을 성직자들의 권력 확장 수단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각 주교관구에서 모금한 헌금은 노동하지 않고 얻은 수익이라고 생각하여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결국 교회와 성직자, 그리고 수도원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카를이 이슬람의 공격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대놓고 비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일 중세 작가들은 그를 교회 약탈자로까지 묘사하였습니다.

4. 이슬람과의 전쟁
711년 서고트 왕국에 침입한 북아프리카 이슬람교도들은(유럽에서는 무슬림을 사라센이라고 부름) 718년까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후 코르도바 공국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기마 군대를 바탕으로 프랑크 왕국 남부 도시인 아키텐 Aquitanie을 점령하고 아키텐 대공인 에우도 공작을 압박했습니다. 결국 에우도 공작은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카를은 군사를 이끌고 비밀리에 에우도 공작을 탈출시킨 후 이슬람 군을 물리치게 됩니다.
이후 아키텐을 무슬림의 손에서 다시 되찾으려 했지만 오히려 분리독립에 꿈을 꾸고 있었던 메도우 공작이 사라센과의 밀약을 맺고 함정으로 마르텔을 유인하였기 때문에 마르텔은 대패한 후 퇴전하게 됩니다. 결국 사라센들은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유럽 본토로 밀고 들어왔고 선발대는 파리까지 진격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마르텔은 푸아티 전투에서 이들을 격퇴하고 다시 이베리아 반도로 밀어내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로써 카를 마르텔은 무슬림의 손에서 기독교를 구한 무관의 왕이 되었고, 당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교황청은 새로운 그리스도교 사회의 수호자로 교황청을 보호할 것을 정식 요청하게 됩니다.

5. 생애 후반과 사후
카를 마르텔이 이슬람을 물리치고 왕국의 안정을 가져왔기 때문에 주변에서 왕위에 앉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카를 마르텔은 결단코 왕을 밀어내지 않아도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던 재상의 자리에 만족하였습니다.
생애 후반 마르텔은 프랑크 왕국 남쪽에 위치한 지역에서 사라센과 밀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프로방스나 아키텐의 귀족들과 전쟁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랑고바르드의 왕 리우르프란드의 도움을 받은 계기로 후일 로마 교황이 성 베드로 무덤의 열쇠 등을 선물로 주면서 요구했던 교황청의 원조와 수호자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열병에 걸려 741년 10월 사망하는데, 프랑크 왕국을 이슬람으로부터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왕족이 묻히는 파리 생드니 대성당 지하에 묻히게 됩니다.
마르텔이 죽은 후 그 자리는 아들 피핀 3세에게 돌아갔는데, 이 과정에서 그동안 눌려 있었던 작센과 바이에른, 아키덴과 이슬람들은 바로 군사를 일으켜 독립을 꾀하거나 세력 확장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보다 더욱 더 강한 아들이 등장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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