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제국의 완성 - 카를 대제(샤를마뉴)

역사와 건강 2021. 6. 1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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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대제

카롤루스 마그누스 Carolus Magnus (740 – 814년)는 라틴어식 발음입니다.

프랑스어로 읽으면 Charlemagne 샤를마뉴,

영어는 Charlemagne 샬러메인,

그리고 독일어는 Karl der Große 카를 데어 그로세 또는 카를 대제라고 합니다.

원래 이름인 Carolus에 "위대하다"는 뜻인 Magnus가 애칭으로 붙은 것입니다. 학계에서 주로 불리는 이름은 카를 대제나 샤를마뉴로 샤를 1세, 또는 카를 1세로 표기됩니다. 여기에서는 샤를마뉴로 지칭합니다.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에게 로마 제국의 황제 이후 최초로 서로마 제국 황제직을 수여 받음으로 중세 유럽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으며, 이후 신성 로마제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근대 국가 발전으로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말년에는 늑막염과 우울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고생하다가 814년 죽음을 맞이한 후 아헨의 한 성당 지하에 매장되었던 것을 11세기 오토 백작이 발견하고 성역화하였습니다.

 

카를 대제의 대통일 사업

800년대 프랑크 왕국의 영토

1. 작센 공국 복속

작센은 카롤링거 왕조의 모태인 아우스트라시아 분국과 경계에 위치하면서 프랑크 왕국에 복속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계속해서 분리독립을 하려고 반란을 꾀했던 국가입니다.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 때부터 매번 무력으로 진압한 후 새로운 지도자를 세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샤를마뉴는 772년부터 약 -800년 사이 몇 번의 원정 끝에 가톨릭교로 완전 개종 후 프랑크 왕국 영토에 복속시켰습니다. 이것으로 훗날 신성로마제국을 열었던 오토 왕조의 출발의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2. 바이에른 공국

바이에른 공국은 샤를마뉴의 할머니 로트루드의 가문이지만 기독교로의 개종을 반대하고 근친결혼을 지속하며 계속해서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794년 샤를마뉴는 바이에른을 다스리고 있었던 고종사촌 타실로 3세 공작을 폐위시키고 아길롤핑 가문의 권한을 박탈한 뒤 바이에른을 프랑크 왕국의 행정구역으로 분할 편입한 후 중앙에서 행정관을 파견하여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3. 랑고바르트(롬바르트) 왕국

아버지 피핀이 죽은 뒤 네우스트리아와 프로방스, 부르고뉴를 상속받은 동생 카를로만 2세는 랑고바르트 왕국과 결탁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카를로만 2세가 일찍 죽게 되어 프랑크 왕국의 모든 통치권은 샤를마뉴가 갖게 되었습니다.

샤를마뉴는 이내 아버지 피핀이 황제 스파르타 2세에게 했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롬바르드 왕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그렇지만 랑고바르트의 통치권은 아버지의 약속과는 반대로 자신이 차지하고 교황에게는 일부 영토만 넘겨주어 교황청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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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부의 슬라브 민족

6-8세기 사이 슬라브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점차로 동유럽 쪽으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결국 비잔티움 제국과 분쟁이 발생하였고 현재 오스트리아 부근까지 밀고 왔고, 작센을 침입하여 일부 영토를 점령하였습니다.

이에 샤를마뉴는 군사를 이끌고 작센으로 출병하여 지도자 비친 Witzin을 생포한 후 항복을 받고 기독교로 개정시켰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샤를마뉴는 지금의 독일 동부에 흐르는 다뉴브 강까지 진격하여 아바르족을 진압하고 영토를 넓혔습니다. 

 

5. 이베리아 반도

샤를마뉴는 777-778년 아베리아 반도에서 사라센을 토벌하였지만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참패하며 이베리아 반도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렇지만 802년 다시 사라센을 토벌하여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사라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 사라센은 샤를마뉴의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이 다스리던 롬바르드에 다시 나타났고, 해적이라는 모습으로 계속해서 이탈리아 부근의 섬들을 약탈하였습니다. 이 뿐 아니라 북유럽에서 무어인들이 계속 쳐들어와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였는데, 801년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 왕 루드비히는 무어인에게 빼앗겼던 바르셀로나를 다시 되찾았습니다.

 

6. 그 이외의 지역

샤를마뉴는 그 이외에 이탈리아와 비잔틴 제국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아바르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은 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프랑크 왕국에 복속시켰으며, 말년에는 크로아티아 지역의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샤를마뉴에 복속되었습니다.

 

황제 즉위

황제 대관식, Friedrich Kaulbach 1861

아버지 피핀 3세를 시작으로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황제가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제국의 영토를 확보하는 것은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충분히 가능했지만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명분입니다. 교황과 귀족들이 자신을 황제로 인정할 명분입니다. 그런데 이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교황 레오 3세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제거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1. 교황 레오 3세의 피신

원래 교황청 행정관 수장 추기경이었던 레오 3세는 795년 12월 26일 제96대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그렇지만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로마의 귀족들은 비주류에 속했던 레오 3세를 제거하려고 테러를 벌였지만 다행히 샤를마뉴 사절에 동행했던 군인들에 의해 구출되어 샤를마뉴 궁전으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2. 로마 입성과 황제 선언

800년 샤를마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교황을 호위하여 로마에 입성합니다.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교황의 간통과 위증죄를 심문하였는데, 교황의 모든 죄는 무죄로 밝혀지고 레오 3세를 모함한 귀족들은 로마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렇게 황제는 로마에서 절대 권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3. 황제 대관식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 12월 25일 레오 3세는 예수 탄생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던 중 무릎을 꿇은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로마 황제로 선언합니다. 이 로마 황제 선언은 교황 레오 3세의 정치적 특수상황이나 목적과 샤를마뉴의 목적이 정확히 일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교황 레오 3세

1) 교황 레오 3세의 목적

교황 레오 3세가 이렇게 서둘러 샤를마뉴를 황제로 옹립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 로마 내 교황의 정적 제거로 교황의 권위 확립
  • 동로마 제국인 비잔티움과의 종속관계 단절: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외부 침략이 있을 때마다 동로마 제국은 군대를 보내 교황청을 보호하였는데, 이는 결국 콘스탄티노플과 동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결과를 낳았습니다.
  • 로마 황제의 자격 미달: 교황 레오 3세는 자신의 아들콘스탄티노스 6세의 눈을 뽑아 퇴출시키고 본인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앉은 동로마 황제 이리니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교황 레오 3세의 입장에서는 로마 제국 내 황제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레오 3세는 샤를마뉴를 황제에 앉힐 수 있는 정당성을 찾았습니다.
  • 안정적인 수호자의 필요성: 비잔티움 제국은 5세기 말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래 로마 교황청을 지켜왔던 수호자였습니다. 그렇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외적으로 이슬람 제국과 슬라브족, 훈 제국 등의 공격이 심해짐에 따라 힘을 잃어갔으며, 내적으로도 황제 자리에 대한 암투가 끊이지 않아 더욱더 쇠락의 길로 빠졌기 때문에 이슬람과 랑고바르드 왕국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레오 3세는 더욱 안정적인 보호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마지막으로 교황이 세속 왕에게 황제관을 씌울 수 있는가에 대한 정당성이 문제였는데, 이때 등장했던 것이 바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는 로마 황제의 칙령으로 내용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투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면서 로마 도시와 서방 제국의 실권을 교황과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동방 제국의 황제로만 남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칙령이 의미하는 것은, 교황의 권위가 황제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에 교황은 모든 권력의 대표자로 세속의 황제를 결정하고 교체할 수 있다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이 문서가 최초 공개되었던 것은 샤를마뉴 아버지 피핀 3세를 당시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키고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3세를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황제의 칙령은 15세기 위조문서로 밝혀졌지만 19세기까지 황제는 교황의 축성을 통해서만 정당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2) 샤를마뉴의 정치적 목적

황제관을 씌우는 것은 샤를마뉴와 전혀 이야기되지 않았던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샤를마뉴가 로마에 입성했을 때 레오 3세는 황제에 준하는 예의로 환영했지만 실제로 황제관을 씌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지요. 그래서 샤를마뉴 입장에서도 부담이 되었던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황제 대관식은 당시 로마와 교황을 지배하고 있던 비잔티움 제국에게는 명백한 도발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 조공을 바쳤던 프랑크 왕국: 옛 로마제국의 서부지역 전체를 다시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비잔티움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상황이기 때문에 샤를마뉴는 황제관을 수락하였습니다.
  • 권력의 야심: 이렇게 황제가 된 이상 서로마뿐 아니라 동로마까지 지배할 목적으로 동로마 황제 이리니에게 결혼을 제안하였습니다. 당시 제국 내 입지가 약해 있던 이리니 황제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지만 동로마 귀족들이 여전히 샤를마뉴는 게르만 야만 민족의 후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강력히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802년 10월 이리니 황제는 황궁 내 고위 관리들의 반란으로 몰락하여 레스보스 섬으로 유배되어 803년 죽게 됩니다.

이렇게 레오 3세의 정치적 판단 하에 샤를마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샤를마뉴도 실질적 황제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큰 거부감 없이 황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프랑크 왕국은 서로마 제국을 잇는 프랑크 서로마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샤를마뉴는 카롤루스 1세로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40년간의 치세 기간 중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여 거의 대부분의 게르만 족과 갈로 로망족을 하나의 국가, 하나의 종교로 통일하여 중세를 완성하였습니다.

샤를마뉴 황제, Albrecht Dürer, 1511–1513

제국을 괴롭혔던 이민족들

샤를마뉴가 독일 지역의 많은 비기독교 이민족들을 복속시켰지만 제국이 커지면 커질수록 변장에서는 계속해서 더 많은 이민족들과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 슬라브족

제2의 민족이동으로 이야기하는 슬라브 인들은 6-8세기 사이 중부 유럽에 정착한 후  남부 비잔티움 제국과 동부의 프랑크 제국 쪽으로 계속해서 자신들의 거주지를 넓혀갔습니다. 슬라브 인들이 건설한 아바르 왕국은 도나우 강을 프랑크 왕국과 국경을 두고 있었는데, 789년 작센을 쳐들어오자 샤를마뉴는 스랄브 지도자 비트친 Witzindmf 생포한 후 기독교로 개종시켰습니다. 그러나 슬라브계인 마자르족이 계속해서 동쪽 국경을 침공하였습니다.

 

2. 무어인과 사라센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난 이슬람인들은 북아프리카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시 이베리아 반도나 이탈리아 섬 등을 침략하였습니다. 게다가 북아프리카 민족인 무어인도 계속해서 이베리아 반도에 출몰하여 전쟁을 벌였을 뿐 아니라 랑고바르트 왕국이나 몰락한 아키덴 귀족들과 결탁하여 샤를마뉴를 괴롭혔습니다.

 

3. 덴마크의 해적

792년 노달빙기아를 정복한 프랑크 왕국의 국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접경하게 되는데, 덴마크와 핀란드인들은 카롤루스가 이상한 종교로 자신들을 세뇌한다는 소문에 분노와 공포감으로 북쪽 국경을 침략하였습니다.

샤를마뉴의 여인들

샤를마뉴는 총 5명의 부인과 결혼을 하는데, 한결같이 비운을 맞이하였습니다.

 

1. 히밀트루드 Himiltrud

부왕 생전 샤를마뉴는 부모의 결정에 의해 20세도 안 되는 나이에 귀족의 딸인 히밀트루드와 결혼합니다. 히밀트루드 가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습니다. 히밀트루드는 잘못 자리를 잡고 있었던 아기를 출산하다 아기 피핀이 기형인 곱사등으로 태어나게 되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샤를마뉴는 히밀트루드를 프림 수도원에 유배를 시킵니다. 그리고 히밀트루드는 811년 수도원에서 죽게 됩니다.

 

2. 데시데리아 desiderata

샤를마뉴는 모친인 베르트라다 Bertrada의 계획에 의해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 데시데리우스 둘째 딸인 데시데리아와 다시 결혼을 합니다. 부왕이 죽은 후 잠시 동안 샤를마뉴는 동생 카를로만 2세와 권력경쟁을 하였는데, 이때 부인이 동생 카를로만의 손을 들어 랑고바르드 왕국과 밀약을 하자 샤를마뉴는 771년 데시데리아를 폐하였습니다.

 

3. 힐데가르트 Hildegard

세 번째 결혼 때부터 샤를마뉴는 드디어 자신의 의지대로 결혼할 수 있었는데, 14살 난 히스파니아 백작 딸 힐데가르트를 부인으로 결정하여 결혼한 후 4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출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783년 힐데가르트는 마지막 딸 힐데가르트의 출산하던 중 사망하였습니다.

샤를마뉴는 힐데가르트를 매우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힐데가르트가 죽은 곳인 메츠 Metz에 수도원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샤를마뉴가 그렇게 독실한 천주교인이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로 부인들을 계속 수도원에 유배시키고 새롭게 결혼한 것에 대해서 교황은 아무 제지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힐데가르트와의 세 번째 결혼 때 첫 번 째 부인인 히밀트루드는 엄연히 수도원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힐데가르트와의 결혼은 샤를마뉴가 중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법이었던 것이고, 샤를마뉴의 후임인 루드비히 황제도 불법적인 결혼을 통해 출산된 혼 외자, 사생아였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 샤를마뉴에게 이러한 점을 지적한 사람은 없었으며 힐데가르트가 죽은 후 샤를마뉴는 또다시 새로운 신부를 맞이하게 됩니다.

힐데가르트

4. 파스트라다 Fastrada

힐데가르트가 죽자 샤를마뉴는 바로 네 번째 왕비 파스트라다를 맞이하는데, 11년 동안의 결혼 생활 중 파스트라다는 오직 두 명의 딸을 얻게 되는데, 병으로 고생하다가 프랑크푸르트에서 794년 죽게 됩니다.

 

5. 루이트가르트 Luitgard

마지막 왕비는 루이트가르트로 파스트라다가 죽은 후 바로 결혼하였습니다. 일각에서는 파스트라다가 죽기 전부터 샤를마뉴는 젊은 루이트가르트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루이트가르트는 아기를 낳지 못하였지만 대신 궁정에서 왕비로서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샤를마뉴가 황제로 축성되기 바로 전인 800년 6월에 죽게 됩니다.

 

6. 후궁들과 그들의 자녀들

샤를마뉴는 황제가 된 후부터 더 이상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미 후대를 이을 자녀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결혼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으로 후대는 추측합니다. 대신 죽을 때까지 14년 동안 후궁들과 생활하며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 자녀들은 대부분 결혼하지 않고 수도원에서 수도사나 수녀로 살아갔다고 합니다.

후궁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거의 전무한데, 유일하게 역사에 기록된 하녀의 이름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지그라다 Sigrada라는 하녀로, 777년 작성된 문서 뒷면에 '지그라다를 하녀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풀어준다'는 내용이 언급되었습니다. 물론 이 지그라다가 샤를마뉴의 또 다른 후궁인지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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