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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일 농민전쟁 (Bauernkrieg)

by 역사와 건강 2021.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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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농민전쟁의 사회적 배경

14세기 유럽의 인구 1/3 – 절반인 약 1억 명이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하였습니다.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중세 유럽

그러나 한세기가 지나자 흑사병은 점점 잊혀 갔고, 유럽 사회는 다시 한번 번영을 이룹니다. 당시 유럽의 가장 큰 제국이 바로 ‚독일 국민의 신성로마제국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었습니다.

이 신성로마제국은 1명의 교황과 1명의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이었습니다. 각 지역에는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사회를 지배하였고,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은 약간의 자유와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며 살아갔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전체 인구의 80%에 달하는 농민들이 바로 이 중세 유럽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농민들은 노예는 아니지만 지주와 영주들에게 예속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영토가 지주와 영주들, 수도원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은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살아갔는데, 수확의 30%를 소작료로 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호세, 사망세, 인두세 등 수많은 세금들로 농민들을 착취당하였습니다. 그 모든 세금들은 빚으로 이어졌고, 이 빚은 죽은 후에도 그 가족들에게 대물림되어 모든 가족들이 평생 노예와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연옥의 두려움에 떠는 중세 유럽

더욱이 가족 중 누군가 죽게 되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연옥에서 죽은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생의 모든 빚을 갚아야 한다“는 논리로 남아있는 재산을 몰수하듯 빼앗아 갔습니다. 결국  남아있는 가족들은 더욱더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농민전쟁의 계기

농민전쟁은 독일에서 일어난 최초의 계급간 전쟁으로, 이 절대다수의 농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비춰준 이들이 있 었습니다.

마틴 루터

그들은  바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토마스 뮌처 (Thomas Münzer)입니다.

먼저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3대 논문 가운데 하나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에서 하나님 앞에서 교황이나 사제, 왕, 귀족, 농부 등 ‚모든 그리스도인은 조건과 신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또한 사제와 평신도라는 계급적 차별을 철폐하려 하였고, 성직과 세상에서 직업의 구분도 부정했습니다.

이 루터의 사상에 매료된 사람이 바로 사제의 길을 걷고 있었던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입니다.

토마스 뮌처

뮌처는 1518년 라이프치히 대학을 다닐 때 루터의 글을 접한 후 루터의 추종자가 되어 프로테스탄트 목사로 개종하여 종교개혁자의 길에 동참하였습니다. 설교단에서는 항상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을 설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직자나 귀족, 평민, 농부 등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동일한 인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평등의 천년왕국이 이제 도래할 것입니다. „

 

뮌처의 설교를 들은 농민들은 마침내 분노를 참지 못해 폭발하게 되었고 그 선두에는 토마스 뮌처가 있었습니다. 결국 중세 봉건제도 밑에서 오랫동안 노동력과 삶을 착취당했던 농민들은 뮌처를 중심으로 농민연맹을 창설하였고, 후에 ‚기독 농민연합‘으로 개명하였는데, 이렇게 모인 농민들이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대에 약 30만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525년 3월 메밍엠 (Memingen)에 모여 12개 요구조항을 결의하였습니다.

농민전쟁 12개조항

  1. 목회자 청빙권.
  2. 십일조 이외의 세금 폐지.
  3. 농노 폐지.
  4. 사냥과 고기잡이 허용.
  5. 산림(山林)의 공동 사용.
  6. 강제 노동은 제한.
  7. 부역 동원 시 생활보장.
  8. 토지세와 노동에 대한 대가 지불.
  9. 성문법에 의한 재판과 사형(死刑) 폐지.
  10. 토지 반환.
  11. 사망세 폐지.
  12. 이상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배되는 내용은 즉시 철회될 것.

이 12개 조항은 두 달 만에 2만 5000부가 넘게 인쇄되어 전 독일에 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점점 더 많은 농민, 광부, 노예, 시민 등이 합류하여 농민연합은 이제 하나의 정치적인 집단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농민들은 그동안 눌려왔던 분노의 표출로 도시와 성, 수도원 등을 돌며 무력으로 점령하고 불을 지르며 영주들과 귀족들을 살해하였습니다.

 

농민전쟁의 시작

농민전쟁은 처음에는 개별적인 봉기로 시작했다가 농민 연합의 세력이 점점 더 커짐에 따라 전 국토로 확장되어 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농민들이 서로서로 연맹을 형성하며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영주들에게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분노한 농만들이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였지만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영주와 대치하는 국면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점점 불어나는 농민 연합은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이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주나 수도원 모두를 위협하는 공공의 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마틴 루터와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필두로 하는 프로테스탄트 연합과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는 신성로마제국 영주들이 정치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서 먼저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신속히 정리하고 농민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던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입니다.

강도와 살인을 일삼는 농민에 반대하여

종교개혁 초기에는 마틴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이 농민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지만 농민들의 세력이 커져가면서 자신의 지지기반인 영주들을 위협하며 점차적으로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농민연맹을 바라보며 마틴 루터는  「강도와 살인을 일삼는 농민에 반대하여」(Wider die Mordischen und Reubischen Rotten der Bawren)라는 글을 발표함으로 농민을 영주들의 공공의 적으로 바꿔 놓았다. 

이 글에서 루터는 영주들을 향해 이렇게 호소하였다.

„공개적으로나 비밀리에나 누군가 할 수 있다면 농민들을 찌르고 목졸라라. 이것은 악마적인 것도, 독소적이 것도 또는 유해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냥 때려죽여야 하는 개와 같은 폭도들이기 때문이다 “
„누군가 할 수 있다면 농민들을 찌르고 때리고 목을 졸라라. 이에 침묵한다면 당신은 영원히 복된 죽음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

결국 교회와 영주들은 서로서로 총을 겨누기보다는 공공의 적인 농민들을 향해 일시적으로 휴전하였습니다.

1525년 5월 15일 프랑켄 하우젠에서 벌어진 농민과 루터를 지지하는 헤센 주의 영주 필립 1세와의 전쟁에서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 8천 명은 대포와 기마병, 그리고 소총으로 무장한 필립 1세의 용병 6천 명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이 전투에서 사망한 숫자만 6천이었고, 6백 명이 투옥되고 300명이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독일 농민전쟁

이후에도 농민들은 정예 군인인 용병들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당하고 고문당하고 학살당했습니다.

많은 보고서에 따르면 참수형, 눈 찌르기, 손가락 자르기, 산 사람을 화형에 처하는 등 영주들에게 보냈던 루터의 글처럼 농민들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그 당시 가장 심한 고문은 바퀴에 살아 있는 사람을 끼워서 죽을 때까지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농민전쟁에 가담한 사람이 30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그중 10만의 농민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현재 인구밀도로 환산하면 거의 100만 명 이상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중세 바퀴고문

농민전쟁이 끝나자 승리자들은 용병들에게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반란 지역에 배상금 지불을 요구하였고, 결국 농민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실제 전쟁 비용의 약 두 배가 걷혔다고 합니다.

피해는 농민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전 독일에 천 여개의 성이 파괴되었고, 300여 개의 수도원들이 불에 타 전소되었습니다.  수도원들은 다시 재건되었지만 많은 성들은 지금도 파괴된 채로 그냥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농민전쟁은 경제 사회학적으로 많은 의의를 남겼습니다.

우선 농민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논의하고 결정한 최초의 민주적 집단행동이었습니다. 이 농민전쟁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계급투쟁으로 해석하였고,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의 근대적 시초‘라고까지 평가합니다.  더 나아가 토마스 뮌처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의 선구자라고까지 평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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