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 단신 왕 피피누스, Pippinus III Brevis
714-768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던, 교황의 승인을 얻어 공식적인 국왕으로 즉위한 단신 왕 피핀 3세는 어릴 때부터 왕으로 길러졌습니다.
피핀 3세는 714년 마르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형 카를로만 Carloman과 함께 영국의 선교사 윌리브로드 Willibrord에게 세례를 받고 파리의 생드니 수도원 Basilique de Saint-Denis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러한 배경은 피핀 3세가 로마 교황청의 수호자가 됨으로 아들 카를 대제가 황제에 오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1. 권력에 대한 광적인 집착
이복형제 그리폰을 제거합니다.
말년이 되어 병약하게 된 마르텔은 큰아들인 카를로만과 피핀에게 프랑크 왕국을 분할하여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죽기 전 이복형제 그리폰 Griffondprpeh 일부 영지를 분할하려 하자 형과 짜고 그리폰을 수도원에 유폐시켜 버립니다. 이 일로 그리폰은 피핀에게 앙심을 품고 후일 바이에른 공국으로 도망하여 반란을 꾀하였지만 결국 753년 알프스 산맥 근처에서 제거됩니다.
다음 타깃은 형 카를로만이었습니다.
피핀이 왕국의 재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왕국의 반은 형 카를로만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 거슬렸습니다. 그렇지만 외부의 적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바로 행동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피핀은 우선 정적들인 그리폰, 바이에른과 아키덴, 작센, 알레만니 등과 제거하기 위해 형의 손을 잡고 동맹을 맺습니다. 그렇지만 공공의 적이 무너지면 이내 형에게 은퇴를 종용하며 압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결국 형 카를로만은 모든 직위에서 은퇴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지만 그 자리는 동생이 아니라 아들 드로고 2세에게 양위합니다. 결국 피핀의 타깃은 다시 드로고 2세로 향했고, 748년 드로고를 수도원에 유폐시키게 됩니다. 이에 분한 카를로만이 이탈리아 성직자들을 동원에 반기를 들어보지만 피핀의 힘을 넘어설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혈육들을 하나 둘 제거한 피핀의 마지막 타깃은 절대 권력으로의 최종 단계인 왕좌였습니다.
왕족과 귀족을 누를 정당성을 만들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왕족과 귀족들이었습니다. 이 걸림돌을 해결하기 위해 찾았던 해결책이 바로 로마 교황청과 주교들이었습니다.
피핀은 자신의 자문인 생드니 주교 푸르하라트Fulharad와 뷔르츠부르크 주교 부르크하르트 Burkhard를 통해 교황 자카리아에게 서신을 보내 무능한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을 국왕으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750년 교황 자카리아는 교황의 이름으로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피핀 3세를 왕위에 임명하게 된다.
피핀은 왕국의 귀족들에게 정당성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로마 교황청이라는 해법을 선택하여 머리를 숙이고 도움을 청했지만 로마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굴러 들어온 셈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로마 교황청은 비잔티움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로마 자체의 군사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슬람을 몰아내며 그 힘을 증명했던 이가 바로 피핀의 아버지인 카를 카르텔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아들 피핀은 어렸을 때부터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아 마인츠의 성 보니파치오 등의 주교들 뿐 아니라 교황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로마 교황의 입장으로는 피핀 3세가 로마 교황청을 지켜줄 수호자이면서 서 유럽에서 교황의 입지를 다시 한번 세워줄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서로의 필요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실력 있는 피핀을 프랑크 왕국으로 인정하고 힐데리히 3세는 폐위당해 수도원에 보내 졌다.
이렇게 교황의 지지를 얻은 피핀 3세는 그동안 눈의 가시였던 귀족들의 회의를 열어서 귀족들의 지지를 받는 왕으로 추대되었고 이후 마인츠 대주교 성 보니파치오에게 세례를 받아 왕으로 축성되면서 칼롤링거 왕조를 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무엘과 사울 왕의 기름 부음을 표본으로 한 왕의 대관식은 이후 계속해서 왕이나 황제의 정통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19세기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오히려 교황과 세속 왕 또는 황제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2.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 카롤링거 왕조의 시작
754년 2월 6일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생 드니 왕실 수도원에서 피핀에게 기름부음 의식을 하고 축성함과 동시에 피핀 3세를 로마의 보호자 patricius Romanorum로 선언하였습니다. 이로서 프랑크 왕국에서 합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이라는 전설 등의 신성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던 메로빙거 왕조가 막을 내리고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교황이 이렇게 피핀을 두둔하고 나선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교황은 정치적으로 롬바르디아 왕국의 압박을 받아왔고, 종교적으로는 비잔티움의 콘스탄티노플과 성상파괴 문제로 문제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열쇠가 바로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였던 것이었습니다.
롬바르디아 왕국의 압력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 잡아 롬바르디아 왕국을 세운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의 권력을 잡고 있는 교황을 압박하여 이탈리아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위협을 받은 교황은 처음에는 비잔틴 제국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정치적 중립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롬바르디아 왕국은 계속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서유럽의 가장 강력한 군주로 등장한 나라가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였습니다. 게다가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뿐 아니라 그의 아들인 피핀 3세, 그리고 카롤루스 대제 모두 신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교황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영화를 다시 한번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롬바르디아 왕국이 교황을 압박하자 피핀 3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롬바르디아 왕국으로 진격하여 아이스톨프를 격퇴하고 이탈리아로 입성합니다. 피핀 3세는 아이스톨프와 그의 후임 데시데리우스로부터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다시 되찾아 교황에게 바치고 교황은 피핀 3세에게 '로마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하사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756년 피핀 3세는 아이스톨프와 교황의 모든 영토를 교황에게 돌려준다는 약속을 양피지에 적고 서명하게 되는데, 이를 근거로 19세기까지 교황이 바티칸 외 중부 이탈리아 지역 땅의 소유권을 합법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피핀은 교황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 했던 아버지 마르텔과는 달리 기꺼이 교황의 수호자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전쟁 물자 조달을 목적으로 교회, 수도원 등의 재산을 인정해 주었으며 전쟁 물자나 병사는 조세와 평민 성인 남자, 정복지 등을 통해 조달하였습니다.
3. 프랑크 왕국의 영토 확장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사후 프랑크 왕국의 변방에 있던 여러 나라들은 일제히 힘을 키워 프랑크 왕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이에 피핀은 아버지 마르텔이 했던 것처럼 처참히 응징하여 복속시켰는데, 그렇다고 모든 가문을 완전히 멸절시키지는 않고 항상 기독교로의 개종과 자신에게 복종할 새로운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독일의 알레마니아, 작센, 바이에른,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프랑스 남부의 아키텐 등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고 피핀에게 복종할 대변인들을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던 사라센 무슬림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아버렸지만 후일 아키텐은 또다시 이교도들을 끌고 들어와 독일을 시도하였습니다.
4. 생애 후반과 사후
이렇게 피핀은 유럽의 동서남북을 원정 다니며 영토 확장과 왕국의 안정을 위해 전쟁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말에게도 갑옷을 입힌 신형 중 기갑 부대를 양성하여 이교도들을 굴복시킴으로 아들 샤를마뉴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길을 다졌습니다.
사후 피핀의 시신은 생드니 수도원에 안치되었는데, 관습에 따라 프랑크 왕국은 피핀의 맏아들인 카를 대제(샤를마뉴)와 카를로만 2세에게 양분되어 상속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블로그 역사와 건강
· 내용상 오류나 저작권에 관련한 문의, 그리고 기타 문의사항은 댓글이나 h_h-2021@kakao.com 로 연락 주세요.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합니다. 저작권에 충돌되는 이미지나 내용 등은 위 메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성한 국가? 신성로마제국의 이름의 역사 (0) | 2021.06.15 |
---|---|
제국의 완성 - 카를 대제(샤를마뉴) (0) | 2021.06.14 |
서자의 억울함에서 권력의 정점으로 -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0) | 2021.06.11 |
민족 대이동 (게르만족 이동) (0) | 2021.06.10 |
손가락이 잘리는 위증죄 (0) | 2021.06.07 |
댓글